안녕하세요
경희대학교한의과대학교수/노원인애한의원 대표원장
배광록 교수입니다.
이식할 배아의 등급을 전해 들을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집니다. 분열 속도가 느리다거나 파편이 많다는 설명을 반복해서 듣게 되면 이번에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됩니다. 등급이 좋지 않아도 임신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배아의 등급은 자라나는 모양과 속도를 관찰해서 매기는 지표입니다. 그 모양을 만들어 내는 힘은 난자가 지니고 있던 에너지와 정자가 전해 준 정보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등급이 낮게 나온다는 것은 배양실의 문제라기보다 그 이전 단계에서 채워졌어야 할 것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분들이 나이를 먼저 떠올리십니다. 물론 시간의 영향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나이에도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함께 보셔야 합니다. 몸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 회복할 시간을 얼마나 가졌는지, 소모가 어느 정도 쌓여 있었는지가 그 차이를 만듭니다. 나이는 바꿀 수 없지만 이 조건들은 준비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신정이 부족하고 기혈이 메마른 상태로 봅니다. 근본 자원이 얕으면 자라나는 힘이 고르지 못하고, 혈이 부족하면 그 과정을 끝까지 밀어 올릴 여력이 남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여기에 오랜 긴장으로 기가 막혀 있으면 있는 힘조차 제대로 쓰이지 못합니다. 실제로 반복된 시술로 지쳐 계신 분들에게서 이 세 가지가 함께 관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방은 신정을 보하는 약재를 중심에 두고 보혈하는 약재를 더해 바탕을 채우는 방향으로 구성합니다. 긴장이 높은 분께는 기의 흐름을 열어 주는 약재를 함께 넣고, 소화가 약해 흡수가 어려운 분께는 비위를 세우는 과정을 먼저 거칩니다. 이렇게 순서와 비율을 조정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이 한약 치료가 지닌 강점입니다.
남편분의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배아가 자라나는 초기 과정에는 정자에서 오는 요인이 관여하고, 특히 파편이 많은 양상에서는 이 부분을 함께 점검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가 같은 기간 동안 준비하시면 다음 주기에 확인할 수 있는 변화의 폭이 커집니다.
임상에서 등급이 아쉬웠던 분들께 가장 먼저 권해 드리는 것은 회복할 시간을 확보하시라는 것입니다. 채취와 이식을 쉬지 않고 이어 오신 분들은 몸이 계속 빚을 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 주기를 비우고 그동안 한약으로 바탕을 채우신 뒤 다시 시작하신 분들이 배양 결과에서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준비 기간은 3-6달 정도가 적당합니다. 이 기간은 난자와 정자가 각각 성숙에 이르는 과정과 맞물려 있어서 준비의 효과를 확인하기에 알맞은 길이입니다. 다음 채취 일정이 잡혀 있다면 그 시점에 맞추어 처방의 방향을 조정해 드립니다.
생활 관리는 단순합니다. 잠드는 시간을 앞당기고, 끼니를 거르지 않으며, 찬 음식을 줄이고, 아랫배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과로가 몰리는 일정을 조금 덜어 내시면 몸이 회복에 쓸 여력이 생깁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준비 기간의 밀도를 결정하는 부분입니다.
한약 치료가 이 상황에서 갖는 장점은 등급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여러 조건을 한 번에 다룬다는 데 있습니다. 자원을 채우는 방향과 그것을 실어 나르는 힘을 보강하는 방향, 막힌 흐름을 여는 방향이 하나의 처방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보충하는 접근으로는 채우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술 일정과의 조율도 어렵지 않습니다. 채취를 앞둔 기간과 이식을 앞둔 기간에는 처방의 성격을 각각 다르게 구성하고, 시술 사이의 쉬는 기간에는 회복에 무게를 둡니다. 현재 사용 중인 약물과 예정된 일정을 알려 주시면 그에 맞추어 복용 계획을 잡아 드립니다.
등급은 결과를 보여 주는 숫자이지 바꿀 수 없는 선고가 아닙니다. 그 숫자를 만들어 내는 조건을 준비하는 일이 지금 하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선택입니다. 그동안의 기록을 가지고 오셔서 준비의 방향을 함께 잡아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